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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학교 최창모 교수] '새로운 눈'으로 떠나는 성지순례






성지순례는 퇴역 목사들의 전유물?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성지순례는 소수 퇴역 목사들의 전유물이었다. 수십 년간 제법 큰 교회에서 목회를 마치고 은퇴한 교역자에게 교회가 주는 마지막 특별 선물이었다. 예루살렘 유학시절 가끔 노구를 이끌고 수십 시간의 비행 끝에 감격적인 성서의 땅에 도착한 그들과 유적지 곳곳을 여행하면서 나눈 대화에서는 한결같이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이라는 한 숨 섞인 고백과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한 저명한 목회자는 ‘그랬더라면 설교가 달라졌을 것인데, 적어도 엉터리 설교는 하지 않았을 텐데 …’라는 후회로 아들 같은 유학생 앞에서 눈시울을 적신 적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이스라엘 성지순례는 한국 기독교인에게 인기 있는 여행상품이 되었다. 전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많은 한국인들이 이스라엘을 찾고 있으며,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은 이스라엘 관광청의 주요 마케팅 고객이 되었다. 1988년 여행자유화 바람과 함께 이스라엘 여행자 숫자는 연간 2천 명을 넘어설 정도로 늘어났으며,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직전 약 3만 명에 육박했다가 그 후 몇 년간 주춤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해마다 3만 명 이상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직항로를 이용하여 편리하게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한국교회의 과도한 짝사랑과 일방적인 편들기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성서 속 히브리 민족의 해방운동을 자주독립 모델로 고취시킨 설교를 통해 ‘내면화’되고, 1960~70년대 개발독재 시절 이스라엘 민족주의 신화를 새마을운동이나 애국주의의 도구로 이용한 ‘정치화’ 과정을 거쳐 1980~90년대 경제성장과 교육 열풍과 더불어 유대인의 영재교육 등의 이스라엘의 상품화, 성지의 ‘상업화’에 이르게 되면서 절정에 이른다.1)

성지-순례란 무엇인가: 거룩한 땅, 거룩한 삶의 순례

우리말 ‘거룩한 땅’으로 번역되는 ‘성지’라는 단어는 실상 구약성서(스가랴서 2장 12절)에서 단 한 차례 등장하는 데,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계약 체결 시 장차 그들에게 줄 땅을 거룩하다고 부른데서 연유한다. 땅이 거룩하다 함은 단지 기후나 풍토 등 물리적인 특징 때문이 아니라, 지리-신학적(geo-theological) 의미에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땅, 즉 성서의 규범(토라)을 지키고 예언자들의 음성(예언서)을 듣고 영혼의 기도(시편 등)를 드리며 들어가 사는 땅이라는 뜻에서 거룩함(sacrum), 즉 ‘구별되어 새로운 땅’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사전적으로 순례(巡禮)란 ‘영적 혹은 도덕적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일컫는다. 특히 기독교 순례의 경우, 교부들의 기록에 따르면 4세기 초 예수 그리스도의 삶(출생과 성장, 활동)과 죽음(십자가 처형과 부활)과 연관된 장소를 찾아 팔레스타인 지역을 방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의 방문에서부터 기원한다. 헬레나는 신빙성 있는 장소마다 기념교회를 세워 방문자들의 예배와 편의 시설을 제공해 주었다. 이후 순례는 사도들이나 순교자들과 연관된 지역들 또는 장소들로 점차 확대된다. 

이처럼 성지순례란 성서의 땅을 찾아가 예수와 성인들의 삶과 가르침을 회상하고 체험하며 거니는 ‘거룩한 땅의 순례’이자, 나아가 그 곳에 서려 있는 신앙과 믿음, 가르침과 고백을 따르고자 다짐하는 순례자들의 삶의 실천적 행위로서 ‘거룩한 삶의 순례’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지순례란 성서적 과거를 찾는 신앙고백이자 곧 신앙체험을 실천적으로 현재화하는 삶의 실천행위인 것이다. 성지순례가 성서적 과거 탐구에만 치우치면 너무 건조하고, 영적 사색에만 몰두하게 되면 현실도피가 되기 쉬운 것은 이 때문이다.

어제의 성지와 오늘의 순례: 현장에서 읽는 성서 

여행에도 목적이 있듯이 성지순례도 정확한 목적이 필요하다. 한국 교회의 성지순례가 정형화된 코스를 따라 수동적인 여행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크게 아쉬운 일이다. 우선적으로 성지순례를 올바로 가치 있게 하자면 성서의 무대가 되는 그 땅의 성격, 즉 자연(自然)지리를 알아야 하고, 나아가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내용, 즉 인문(人文)지리를 알아야 한다. 자연지리가 인문지리와 만나서 역사(歷史)지리가 된다. 역사란 공간(땅)에서 사는 사람들이 남긴 시간의 흔적이다. 사전에 배경 지식을 쌓는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고 떠난다면 그 깊이를 맛보기는커녕 “괜히 다녀왔다”거나 “오히려 성서이해에 혼란만, 신앙생활에 방해만 되었다”는 불평을 남기기 십상이다. 

문제는 성지의 강산도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바뀌었고, 땅의 주인 역시 수 없이 바뀌어 새로운 주인이 등장했다. 2천 년 전 그 땅에서 쫓겨난 유대인이 전 세계를 떠도는 동안 그 땅에는 새로운 주인들―로마인, 기독교인, 무슬림, 터키인, 영국인 등―이 들어와 새로운 역사의 흔적들을 많이 남겼다. 유대인들이 돌아와 되찾은 그 흔적 아래의 땅은 두 개의 땅,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으로 갈라져 있다. 그 과정에서 그 땅은 붉은 피로 얼룩졌다. 당연히 오늘날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삶의 방식도 예전과 같지 않다. 

성서의 땅은 곧 상처의 땅이 되었다. 비록 곳곳에 성서의 흔적이 황성 옛터처럼 드문드문 폐허로 남아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현장은 켜켜이 쌓여 복잡하게 엉켜 붙은 역사의 흔적들이 그 위를 덮고 있어 성서의 흔적만을 쉽게 구분해 내지 못하게 만든다. 아니, 성서적 과거를 덮고 있는 역사의 층위들을 하나하나 뚫지 못하고서는 성서의 땅과 대면할 수 없다. 결국 성지순례는 언제나 피와 상처의 역사적 흔적을 거쳐 통과해야만 목적지에 도달하는 과정이 된다. 그래서 나는 성지순례를 ‘현장에서 읽는 성서’라 부른다. 성지순례란 ‘과거를 찾는 여행’이자 곧 ‘현재를 통해 과거를 해석하는 여행’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읽고, 현재의 창을 통해 과거를 재해석함으로써 자신의 성지 이해와 신앙 체험을 실천적으로 현재화하는 고백이자 행위인 것이다.

‘거룩한 땅’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

예컨대 오늘날 예루살렘은 예수시대의 예루살렘이 결코 아니다. (물론 예수시대에나 지금이나 예루살렘에는 ‘평화’가 없다.) 예루살렘에는 검은 모자와 검은 두루마기 차림에 길고 검은 수염을 달고 거리를 활보하는 정통파 유대인들, 다양한 기독교 종파의 수도사들, 하얀 통치마 같은 옷을 입고 머리에는 터번을 두른 무슬림들 등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며, 서로 다른 신앙과 색깔로 제각각 분주한 삶을 살아간다. 때로는 욕심과 만용으로, 배타적 감정과 보복의 법칙에 따라 죽고 죽이는 피 흘림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 땅과 이 곳 사람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 사랑과 증오, 절망과 희망, 전쟁과 슬픔, 영광과 오욕, 상실과 울부짖음, 고통과 후회가 교차된 살아있는 박물관,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인가? 홀로코스트 기념관(야드바쉠)을 방문 한 직후 “차라리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몽땅 처리했어야 했어. 예수를 죽인 유대인의 형벌치곤 너무나 당연해”(반유대주의자)라고 말한 목사나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서 원주민들을 진멸한 것처럼,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을 모두 몰아내야해”(정복주의자)라고 말하는 장로,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이제 이스라엘에서 한국으로 옮겨 왔어. 이제 복음을 역수출해야 돼”(세대주의자)라고 말하는 오래 믿은 평신도들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극단적인 태도가 과연 예수의 가르침을 설교하는 목사의 성직자다운 생각이며,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의 중직자가 지닐 올바른 태도인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오래 믿은 이들의 신앙심 깊은 고백일 수 있을까?

“진정 무엇인가 발견하는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이다. 수없이 만나게 될 스쳐지나가는 풍광과 사람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것인가는 성지순례에서 매우 중요하다. 낯선 것을 즐기고 새로운 것, 모르는 것을 갈구하고, 끊임없이 다양한 삶들과 관습들을 배우는 것보다 더 좋은 학교는 없다. 성지순례가 소용이 있으려면 성지순례가 그런 무지로부터, 오류로부터, 변질로부터, 편견으로부터, 독선으로부터, 광기로부터, 그리고 인간의 노고로부터 벗어나 궁극에는 영혼이 깨끗해지는 지경으로 우리를 안내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현지인들과의 많은 접촉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소통이 되든 안 되든, 가능한 한 현지인들과 많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현지 가이드의 일방적인 시각과 설명을 여과 없이 듣고 뒤따르는 답사만큼 바보스러운 답사가 또 있을까? 단체 여행에서 현지인들과 접촉하기 위해서는 정해진 일정을 마친 후 비교적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야간(夜間) 답사를 잘 활용하라고 충고하고 싶다(이를 위해 안전 확보에 대한 사전 확인이 필요하다). 카페와 거리에서 자유롭게 현지인과 나눌 수 있는 대화란 어떤 풍경 사진보다 더 마음속에 오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성지순례에서 편견 없이 현실과 대면하고 냉철하게 직시하여 자신의 무지와 오류, 편견을 벗어나 시야를 넓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무엇이 이스라엘의 입장이며 유대인의 생각인지 알아볼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이 겪는 삶의 현실 앞에서 정직하게 마음의 문을 열고 그들의 이야기 또한 경청할 필요가 있다. 윤리적인 판단 없이 무조건적인 편들기나 맹목적인 연민, 비이성적인 비판이나 가르치려는 듯한 자만심은 모두 금물이다. 냉철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되 연민하지 말며, 우리의 지난 과거를 보듯 가르치려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류에게 나누어 주신 생명 ? 사랑의 실천과 평화 ? 화해 만들기를 위한 노력에 자신을 헌신하는 자세로, 거듭 태어나기 바라는 마음으로 순례의 행진을 해야 할 것이다.

평화·치유·화해순례 ―‘길’ 위의 삶, 길속의 답 찾기 

성지순례는 곧 평화순례, 치유순례, 화해순례가 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예수의 가르침은 ‘평화로운 공존’과 ‘치유와 화해의 삶’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례’란 목적지보다는 ‘길’(과정)이 더 중요하다. 목적지 중심의 순례에서 ‘길’이란 단지 출발점과 목적지를 잇는, 짧을수록 좋고 빨리 지날수록 좋은 비용 절감과 시간 단축과 거리 극복의 대상일 뿐이다. 평화순례란 길 위에 오래 머물면서, 길 위에서 삶의 목적지 이상의 의미와 무게를 발견하고, 길 위에서 해답을 찾는 행위이다. 

이러한 성지순례는 처음부터 여행 자체가 ‘공정’해야 한다. 공정여행(fair travel)이란 생산자와 소비자가 대등한 관계를 맺는 공정무역(fair trade)에서 따온 개념으로, ‘착한여행’이라고도 한다. 즐기기만 하는 여행에서 초래된 환경오염, 문명 파괴, 낭비 등을 반성하고 방문하는 어려운 현지의 주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자는 취지에서 2000년대 들어서면서 유럽을 비롯한 영미권에서 추진되어 왔다. 여행 산업이 전 세계적으로 매년 10퍼센트씩 성장하지만 여행으로 얻어지는 이익의 대부분은 G7국가에 속한 다국적 기업에 돌아가기 때문에 현지인이 운영하는 숙소를 이용하고, 현지에서 생산되는 음식을 구입하는 등 공정여행을 통해 지역사회를 살리자는 취지도 담고 있다. 이런 공정여행의 정신과 내용이 성지순례에도 도입?확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지역에 편중되어 순례 방문지 있는 문제 역시 개선해야 한다. 팔레스타인 지역 내에도 성서와 관련된 장소는 얼마든지 많다. 동예루살렘을 포함하여 여리고, 세겜, 아이, 베델, 사마리아 등이 대표적이다. 그곳을 방문하려면 반드시 이스라엘이 설치해 놓은 분리장벽과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길이 700킬로미터, 높이 8미터에 달하는 콘크리트 장벽에 갇혀 살면서 매일 고통스런 검문소를 통과해야만 하는 팔레스타인의 일상생활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평화 없는 그 땅에 진정한 평화순례가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난민촌과 팔레스타인의 기독교인 마을을 방문하여 그들이 처한 실상과 난민들의 삶 이야기, 수감자들과 희생자 가족들의 애환을 듣고 기록하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때 치유순례는 시작된다. 평화운동 단체들과 네트워킹 하기, 팔레스타인 예술가들의 아지트나 그들이 운영하는 미술카페나 공연장 등을 방문하기, 지역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올리브기름 등 특산품 구매하기 등 공정거래를 위한 실천을 통해 화해순례가 시작될 수 있다.

평화연대의 성지순례를 위하여

팔레스타인 영토는 이스라엘의 약 4분의 1이며, 인구는 이스라엘의 절반 정도이다. GDP는 약60분의 1, 1인당 국민소득은 10분의 1이 채 안 된다. 평균 실업률은 이스라엘의 3배가 넘고, 가자지구의 경우 노동 인구의 70퍼센트가 실업 상태다. 군사력이나 무기체제는 비교조차 불가능하다. 팔레스타인의 경제는 ‘원조경제’라 할 정도에 불과하며, 전기?수도 등 기반시설 대부분은 이스라엘에 의존한다. 지독한 나치의 가스실에서 겨우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이제는 골리앗이자 갑(甲)이요 가해자가 된 역사의 불가해한 역설을 바라보는 것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동등하지 않다면 서로를 이해할 수 없으며, 차이가 없다면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말이나 행위가 필요 없을 것이다.” 

여기서 ‘같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천부적으로 평등하다 함이요, 이는 상호 ‘이해’의 필수 조건이 된다. 동시에 ‘다르다’는 것은 차이를 의미하며, 이는 ‘소통’의 당위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같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고, 다르기 때문에 대화할 필요가 있다. 둘은 모순 같지만 서로 맞물려 있다. ‘같음’을 인정하지 않고 ‘다름’ 또한 존중하지 않으면 세상은 온통 ‘차별’뿐이라는 사실을 각성시킨다. 즉, 동질성이 평등의 기초라면, 이질성은 자유의 조건이다. 자유가 없다면 평등이 깨지고, 거기에는 불균형과 두려움과 인종차별이 있을 뿐이다. 이질성을 불허하는 동일성의 원리, 즉 대상을 획일화하려는 지배의 담론이 곧 이데올로기이다. 같기 때문에 평등할 수 있으며, 이와 동시에 다르기 때문에 이해와 소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의 입장과 관점만을 허용하는 배타적 근본주의는, 그것이 이슬람 근본주의이든 기독교 근본주의이든 유대교 근본주의이든 간에 일부 서구 정치 때문에 어느 정도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손 치더라도, 절대적인 의미에서 반현대적이다. 반개방적?반자유적?반탐구적이라는 점에서 근본주의는 반현대적이다. 근본주의는 미리 정해진 하나의 견해만을 절대적으로 추종함으로써 그밖의 가능성과 여지를 헤아리지 않는다. 현실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면서 상대의 어떤 차이나 뉘앙스도 고려하지 않는다. 자기 아닌 모든 것을 적이나 악으로 간주할 때 스스로도 적과 악이 된다. 

세 유일신 종교의 요람이자, 온 인류의 평화와 우애, 개방과 사랑의 요람으로 여겨졌던 중동 지역이 이제는 전쟁과 증오, 파괴와 반계몽적 행위의 무덤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런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그 역사적 배경이나 정치적 과정이 결코 한반도의 그것과 같지 않지만 두 지역의 현실은 결코 다르지 않다.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고 아픈 부위이며 가족의 중심은 아버지가 아니고 아픈 사람이라고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 지구의 중심은 결코 미국이 아니고 아픈 지역, 갈등과 분쟁으로 얼룩진 땅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와 팔레스타인은 지구의 두 중심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두 지역 간의 평화 연대로 이어지는 성지순례가 진행된다면 그 의미는 전 지구적 평화를 도모하는 순례가 된다.

이제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두 지역 간의 생명과 평화를 위한 순례의 길을 진정성을 갖고 지속적으로 떠나야 할 것이다. DMZ와 분리장벽이라는 고착된 분단의 아픔을 나누는 미래의 지구적 평화를 위한 정기적인 상호 방문과 인적 교류, 각종 평화교육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 및 실행, 정치적 견해를 넘어서는 예술 분야(음악?미술?영화?사진 등)의 교류전 등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한반도가 통일될 때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에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할 때까지 두 지역의 교류와 소통과 연대와 기도가 계속되기를 희망한다.

최창모
연세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레바논 전쟁이 한창이던 때(1984년)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신구약중간사(유대묵시문학과 초기 기독교)를 공부하였다. 제1차 걸프전(1991년)을 보고 귀국하여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히브리학과에 자리를 잡았고, 안식년을 맞아 다시 예루살렘을 찾았을 때 제2차 걸프전(2003년)이 일어났다. 운명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전쟁의 얼굴’을 보러 그는 아예 이라크로 들어갔다. 동양 유일의 학과(히브리학과)가 시장화된 대학에서 퇴출될 위기 속에서 60일간 천막강의로 저항하였으나 끝내 학과를 지키지 못했고, 지금은 건국대 중동연구소 소장 및 문과대학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이스라엘사》 《금기의 수수께끼:성서 속의 금기와 인간의 지혜》 《기억과 편견:반유대주의의 뿌리를 찾아서》 《예루살렘:순례자의 도시》 등이 있다.

각주)-----------------
 최창모, “한국 근대지식인의 유대인 이해,” 《한국중동학회논총》 제30-3집(2010), 71~100쪽.; “한국 근대사에 등장한 유대인 ? 유대인 이미지 연구,” 《한국중동학회논총》 제29-1집(2008), 93~113쪽.; “한국사회의 유대인 이미지 변천사 소고,”《한국이슬람학회논총》 제18-1집(2008), 113~138쪽 등을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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